선산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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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산 김씨는 신라 문성왕의 8세손 김선궁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본관은 선산이며, 조선 태종 때 선산으로 지명이 바뀌면서 선산 김씨로 불리게 되었다. 김선궁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를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워 '선궁'이라는 휘를 하사받았으며,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선산 김씨는 김선궁을 시조로 하는 김선궁 계와 김한충을 시조로 하는 김한충 계, 김추 계로 나뉘며,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걸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주요 인물로는 김숙자, 김종직, 김효정, 김응기 등이 있으며, 현대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기준 약 13만 8천여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으며, 전국 각지에 집성촌이 분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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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산 김씨 - 김윤환 (1932년)
김윤환은 대한민국의 언론인, 정치인으로 5선 국회의원, 대통령비서실장, 정무장관을 역임하며 정권 창출에 기여하여 "킹 메이커"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민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신장암으로 사망했다. - 선산 김씨 - 김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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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김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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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가문 | 善山金氏 (선산 김씨) |
다른 이름 | 一善金氏 (일선 김씨) 坪城金氏 (평성 김씨) |
국가 | 조선 |
영지 | 구미시 |
가조 | 김선궁 김한충 |
저명한 인물 | 김선궁파: 김종직 김효원 김범부 김동리 김윤환 김건희 |
성씨 정보 | |
성씨 | 善山金氏 (선산 김씨) |
국가 | 한국 |
이칭 | 일선 김씨 (一善金氏) 평성 김씨 (坪城金氏) |
관향 |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
원시조 | 김알지 (金閼智) |
시조 | 김선궁 김한충, 또는 김추 (추정) |
집성촌 | 대구광역시 전역 경상북도 전역 부산광역시 전역 경상남도 창원시, 진주시, 밀양시, 거창군, 합천군, 함양군, 함안군, 창녕군 서울특별시 전역 경기도 이천시 일원 광주광역시 전역 전라남도 나주시, 목포시, 장흥군, 신안군 일원 전라북도 군산시, 익산시, 김제시, 고창군, 장성군, 담양군 일원 대전광역시 전역 충청남도 공주시, 당진시 충청북도 충주시 일원 강원도 춘천시, 원주시, 홍천군, 화천군 일원 제주도 |
인물 | 김선궁계: 김원숭 문화왕후 김제 김주 김달상 김효정 김숙자 김종직 김지경 김응기 김효원 김이원 김신원 김세렴 김익용 김범부 김동리 김윤환 김태환 김재홍 김건희 김한충계: 김기 김취성 김취문 김정묵 김덕 김관용 김성조 |
년도 | 2015 |
인구 | 138,819명 |
2. 본관
선산(善山)은 본래 신라 눌지왕 때 일선군(一善郡)이라 하였으며, 614년(진평왕 36)에 일선주(一善州)로 승격되었다가 687년(신문왕 7)에 폐지되었다. 757년(경덕왕 16) 숭선군(崇善郡)으로 개칭했다가, 995년(성종 14)에 다시 선주(善州)로 고쳤으며, 1018년(현종 9) 상주의 속현이 되었다.
시조 김선궁(金宣弓)은 본래 이름을 김선(金宣)이라 하였으며, 신라 제45대 문성왕의 8세손( 김알지로부터는 30세손)이다. 김선은 젊은 시절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스스로 자수하였으나, 조정에서는 그의 행위를 효(孝)로 여겨 죄를 묻지 않았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김선은 선산군(일선)에서 왕건에게 달려가 합류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선궁"(宣弓)이라는 휘를 받았다.[2] 그 이후 김선궁은 "경난보국공신"(靖難輔國功臣)으로 승진하여 관직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자손들은 선궁을 시조로 삼아 본관을 "일선"으로 하였으나, 조선 태종 때 일선의 지명이 "선산"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선산김씨라 불리게 되었다.
1143년(인종 21)에 일선현(一善縣)으로 승격되었으며, 다시 지선주군사(知善州郡事)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 군현제 개편에 의해 1413년(태종 13)에 선산군(善山郡)으로 되었다가 2년 뒤 선산도호부(善山都護府)로 승격되었다.
1896년 경상북도 선산군(善山郡)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선산면, 옥성면, 도개면, 해평면, 산동면, 고아면, 구미면, 장천면, 무을면이 되었다. 1963년에 구미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78년에 시로 승격하여 분리되었다. 1979년에 선산면이 선산읍으로 승격했다. 1995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미시와 선산군이 통합하여 새로운 구미시가 되었다.
3. 시조 및 분파
선산 김씨 계상파는 전지중추부사 김희운(金希雲)의 아들 김계상(金継祥)이 1592년(선조 임진년)에 왜장 소서비(내등여안)에게 징용되어(강제적인지 자발적인지는 불명) 경상도 상주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 안내를 맡았으나, 왜란 종결 후 자신의 행위를 부끄러워하여 상주로 돌아가지 않고 함경도에 토착하였다.
3. 1. 김선궁(金宣弓) 계
시조 '''김선궁'''(金宣弓)은 초명이 김선(金宣)이며, 고려조에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 門下侍中)을 지내고 대승(大丞)에 추증되었다. 선주백(善州伯)에 봉해지고 순충공(順忠公)의 시호가 내렸다.[10]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할 때 숭선(嵩善. 지금의 경북 구미시) 지방 전투에 병사를 모집함에 김선궁(金宣弓)이 고을 아전(衙前)으로써 응모하니, 고려 태조는 자신이 쓰던 활 어궁(御弓)을 하사하고 이름도 선궁(宣弓)이라 지어 주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워 시중(侍中)에 오르고 선주백(善州伯)에 봉해졌다.[10] 선주(善州)는 일선(一善)의 고호이다. 아들 김봉문(金奉文)도 아버지 뒤를 이어 일선(一善)에서 아전(衙前. 지방 지배자)이 되었다.
김선궁의 《순충공 신도비명》(順忠公 神道碑銘)에도 처음 적(籍)을 일선(一善)에 두어 세계(世系)를 이어 왔으나, 조선 태종 때 지명이 선산(善山)으로 개칭됨에 따라 관향을 선산(善山)으로 하였다고 하였다.[12]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을 일선(一善)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조선 태종 때 선산(善山)으로 개칭됨에 따라 선산(善山)으로 하였다. 혹칭 '''일선 김씨'''(一善 金氏)라 한다.[11]
14세 '''김제'''(金齊)는 고려 조봉랑 지평해군사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군청벽에 도해 벽상시 27자를 남기고 바다로 들어갔다.
[ 平海海上 ] 평해해상
'''呼船東問魯連津(호선동문노연진) 배를 불러 동쪽 노중련의 나루를 물으니,'''
'''五百年今一介臣(오백년금일개신) 오백년 고려조의 한사람 신하로다.
'''可使孤魂能不死(가사고혼능불사) 외로운 이 영혼이 죽지 않고 남는다면,
'''願隨紅日照中垠(원수홍일조중은) 붉은 해를 따라가 님 계신곳 비추리.
14세 '''김주'''(金澍)는 김제(金齊) 아우로 고려조에 등과하여 벼슬이 예의판서로 하절사로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조선이 개국하자 서신과 의복을 아내에게 보내고 돌아오지 않았다.
[ 鴨綠江別書狀官 ](압록강별서장관) 서장관에게 보낸 압록강 고별 편지
隴樹蒼蒼塞日昏 (롱수창창새일혼) 언덕위의 푸른나무 해를 막아 어둡고,
白山雲雪照離樽(백산운설조이준) 백두산의 구름과 눈 이별의 술잔에 비취네
君行莫恨天涯別(군행막한천애별) 그대는 가서 천애의 이별을 한탄마오
我是歸人亦斷魂(아시귀인역단혼) 나는 이에 살아서 돌아가나 혼은 죽었네
김선궁의 손자 '''김흥술'''(金興述)은 삼사우윤(三司右尹) 김봉문(金奉文)의 아들로, 호장(戶長)을 역임하고 일파를 이루었다. 특히 김흥술의 13세손 김숙자와 그의 아들 김종직은 가문을 빛낸 인물이 되었다.
김숙자(金淑滋)는 길재로부터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 받았으며,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등을 역임하고, 낙향해서는 조선 성리학 발전에 큰 업적을 쌓았다.
김종직은 조선 초기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로 공조참판·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낙향해서는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수립하는 데 주력하면서,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 여러 제자들을 가르쳐 중앙 관료로 대거 진출시켜 사림파를 형성해 훈구파와 대립하다 무오사화를 당하여 엄청난 화를 입었다.
김흥술의 후손 '''김교'''(金嶠)는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判書)였으며, 공신으로서 선산부원군(善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김선궁의 후손 '''김광발'''(金光發)은 벼슬이 경력(經歷)이었으며, 일파를 이루었다.
3. 2. 김한충(金漢忠) 계
시조 '''김한충(金漢忠)'''은 신라 김알지의 후예로[13] 경순왕의 당제(堂弟)이다. 931년 고려 태조가 신라를 방문하고 귀국할 때 볼모가 되어 왕건을 따라간 김유렴(金庾廉)의 고손이다.[14] 시호는 원평공(元平公)이다.
1087년(선종 4) 합문인진사(閤門引進使) 상경차도위(上輕車都尉)가 되어 요나라에 다녀왔고, 형부시랑·예부상서를 거쳐 추밀원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였다. 1097년(숙종 2) 동북면병마사로 여진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고, 1107년 윤관(尹瓘)이 여진을 정벌할 때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15] 그러나 부인이 고려 문종 비첩의 딸이었으므로 청요직에는 취임하지 못하였다.[16] 3남 2녀를 두었는데, 차녀는 수주최씨(水州崔氏) 최정(崔精)에게 출가하였다.[18]
이후 세계가 실전되었으나, 고려말 화의군(和義君) '''김기'''(金起)를 1세조(世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김기는 중서령 김성원(金成元)의 아들로 고려말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역임하고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다. 고려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선산군 옥성면 포상동(浦上洞) 하송산(下松山) 아래에 터를 잡고 살았다. 화의(和義)는 선산(善山)의 별호이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선산(善山)으로 하였다. 후손들은 '''들성'''(坪城)에 정착하여 500여년간 세거하였다. 혹칭 '''들성(평성) 김씨'''(坪城 金氏) 라고도 한다.
화의군 김기(金起)의 5대손 '''김취문'''(金就文. 1509 ∼ 1570)은 청백리에 선정되고 강원도 관찰사, 대사간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저서 《구암집》에 선산 김씨(들성)의 먼 조상의 휘가 김한충(金漢忠)이라 하였다.[17] 김선궁계 선산(일선)김씨 대동보 경오보(庚午譜, 1690년)에는 판서공 김원로의 사위 '''김기'''(金起)는 경주인(慶州仁)으로 고려 추밀사(樞密司) 김한충(金漢忠)의 후손으로 선산(善山)으로 개본(改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말엽 검교중랑장을 지낸 16세 '김문'(金文)은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을 파조로 하여 4대파로 분파하였다.3. 3. 김추(金錘) 계 (추정)
시조 김추(金錘)는 경순왕과 고려 태조의 맏딸인 낙랑공주 왕씨 사이에서 태어난 8자로 상서령(尙書令)을 지내고 일선군(一善君)에 봉해졌다고 한다.[20]
최근 시조를 경순왕의 8자 일선군(一善君) 김추(金錘)라고 하지만,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 원문에는 경순왕의 8자가 김종(金鐘)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후 경주 김씨 족보에 경순왕의 8자들이 등재되었으나, 이름을 바꾸거나 시호를 만드는 등 가필이 심하게 이루어졌다. 《김은열 묘지명》에 등장하는 경순왕의 8자들은 『고려사』 등의 문헌은 물론, 금석문(金石文)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삼척 김씨(三陟 金氏) 또한 시조 김위옹(金渭翁)의 아버지를 경순왕의 8자 삼척군(三陟君) 김추(金錘)라 한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 《조선씨족통보》 등의 문헌에는 김추(金錘)를 시조로 하는 김씨 계통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시조 김추(金錘)에 대해서는 자료 및 견해가 다양하여 추가적인 고증이 필요하다.[21]
4. 주요 인물
4. 1. 고려
김선궁(金宣弓)의 장자 김봉술(金奉術)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으며 시호는 장절공(壯節公)이다. 이후 6대가 실전(失傳)되었다. 김선궁의 차자인 김봉문(金奉文)은 삼사우윤(三司右尹)과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냈다. 김봉문의 아들 김흥술(金興述)은 호장(戶長)을 지내고 일파를 이루었다. 다른 아들 김흥림(金興林)은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김흥림의 손자 김임남(金任南)은 상장군·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문화왕후의 조부인 김광의(金光義)는 상서좌복야 상주국 화의현개국백(尙書左僕射 上柱國 和義縣開國伯)에 봉해졌다. 문화왕후의 아버지인 김원숭(관문)은 선주(善州). 선산) 출신의 호족으로 수태위 겸 시중 상주국 화의군개국후(守太尉 兼侍中 上柱國 和義君開國候)에 봉해졌다. 김원숭의 딸은 성종의 비인 문화왕후이다.
9세손 김득충(金得忠)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상주국태자태사(上柱國太子太師)를 지냈다. 13세손 김계수(金季壽)는 판종부사사(判宗簿寺事)를 역임하였다. 김원로(金元老)는 고려(高麗) 증(贈) 정순대부(正順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 동부찬성사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진현관 대제학(進賢館 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 행(行) 신호위보승낭장(神虎衛保勝郎將)을 지냈다. 14세손 김제(金濟)는 고려 말 절신(節臣)으로 증 예조참판, 시호 충개공(忠介公)이다.
14세손 김주(金澍)는 고려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내고, 고려 말에 사신(使臣)이 되어 중국에 들어갔다가, 조선 태조가 개국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며 서원에 배향되었고 일파를 이루었다. 김숭(金崧)은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냈다. 김인선(金印宣)은 집현전 태학사를 지냈다.
김성원(金成元)은 서운관정,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다. 김성원의 아들 '''김기'''(金起)는 고려 말에 등제하여 정순대부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이르렀으며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다. 고려가 망하자 슬퍼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지켜 선산(善山)에 은거(隱居) 종신(終身)하였다. 김성부(金成富)는 전의부정(典醫副正)을 지냈다. 김성룡(金成龍)은 산원동정(散員同正)을 지냈다. 김성여(金成呂)는 별장동정(別將同正)을 지내고 평안도에 정착하였다.
4. 2. 조선
선산 김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김효정은 이조 판서와 집현전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하고 시호 문정공을 받았으며, 서원에 배향되었다. 김응기는 우의정, 좌의정, 영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천문, 지리, 수학에도 정통하였으며, 시호 문대와 함께 서원에 배향되었다. 김효원은 삼척부사를 지내고 호당에 뽑혔으며, 서원에 배향되었고 일파를 이루었다. 김숙자는 사예를 지내고 시호 문강공을 받았으며, 서원에 배향되었고 성리학 발전에 큰 업적을 쌓았다. 그의 아들 김종직은 형조판서를 지내고 시호 문충공을 받았으며, 서원에 배향되었고 영남 사림파의 종장으로 추앙받았으나, 무오사화를 겪었다.김취성은 조선 전기의 학자로, 박영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김정국과 이언적의 추천을 받았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구와 의학에 몰두하여 『진락당집』을 저술하였다. 김취문은 김광좌의 아들로, 박영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1537년(중종 32) 문과에 급제하여 명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1568년(선조 1)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고, 문집 《구암집》을 남겼다. 그의 시호는 정간에서 문간으로 바뀌었다. 김종무는 김취문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상주 북천전투에서 순국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상주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김양선은 김광좌의 증손자로, 동강 김우옹의 총애를 받았으며, 1616년(광해군 8)에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사를 역임하였다. 김하량은 여헌 장현광의 문인으로, 1632년(인조 10)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원섭은 김하량의 아들로, 1672년(현종 13)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등용되었으나, 1692년 민정중의 죄를 논하다 단천으로 유배되었다. 김몽화는 김취문의 후손으로, 1754년(영조 30)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좌윤에 올랐다. 김성진은 김취연의 후손으로, 1801년(순조 1)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 경상도 도사를 역임하였다.
4. 3. 근·현대
김창종은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역임하였다. 김우석은 내무부 장관과 건설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김영환은 제3대 과학기술부 장관과 4선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김윤환은 6선 국회의원과 신한국당 대표를 역임하였다. 김동영은 4선 국회의원과 정무장관을 역임하였다.김태환과 김영선은 각각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김영철은 대구고검장과 법무 연수원장을 역임하였다. 김범부는 독립운동가이다. 김철수는 서울대 교수이자 헌법학자이다. 김병윤은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김광섭은 제20대 영부인의 부친이며, 김건희는 제20대 영부인이다. 김정묵(金正默, 1888 ~ 1944)은 일명 해산(海山)·규환(奎煥)으로,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며,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덕은 21대 통일원장관 겸 부총리를 역임하였다. 김관용은 경북지사를 역임하였다. 김성조는 16~18대 국회의원, 대학총장, 경북문화관광공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김상조는 공정거래위원장을 역임하였다.
5. 집성촌
대구광역시, 경상북도, 부산광역시, 서울특별시, 광주광역시, 대전광역시 전역에 선산 김씨 집성촌이 있다.[4] 경상남도 창원시, 진주시, 밀양시, 거창군, 합천군, 함양군, 함안군, 창녕군, 김해시에도 집성촌이 분포한다.[4] 경기도 이천시 일원, 전라남도 나주시, 목포시, 장흥군, 신안군 일원, 전라북도 군산시, 익산시, 김제시, 고창군, 장성군, 담양군 일원, 충청남도 공주시, 당진시, 충청북도 충주시 일원, 강원도 춘천시, 원주시, 홍천군, 화천군 일원, 제주도에도 집성촌이 있다.[4]
2015년 통계[4]에 따르면 경기도이천시 (730명, 총인구의 0.39%), 강원특별자치도춘천시 (2,849명, 총인구의 1.1%), 경상남도거창군 (1,050명, 총인구의 1.95%. 전국에서 총인구 대비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경상남도합천군 (296명, 총인구의 0.72%), 경상남도함양군 (264명, 총인구의 0.74%), 경상남도창녕군 (250명, 총인구의 0.45%), 경상북도구미시 (2,818명, 총인구의 0.72%), 경상북도칠곡군 (770명, 총인구의 0.7%), 경상북도고령군 (117명, 총인구의 0.39%), 전라북도김제시 (217명, 총인구의 0.28%), 충청남도공주시 (592명, 총인구의 0.56%) 등지에 집성촌이 있다.
함경남도단천군 이중면, 함경북도청진시 욱동, 개성특별시개풍군에도 집성촌이 존재한다.[5]
6. 인구
2000년에는 109,682명, 2015년에는 138,819명이였다.[4] 집성촌은 다음과 같다.
- 경기도 이천시(730명, 총인구의 0.39%)
-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2,849명, 총인구의 1.1%)
- 경상남도 거창군(1,050명, 총인구의 1.95%. 전국에서 총인구 대비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 경상남도 합천군(296명, 총인구의 0.72%)
- 경상남도 함양군(264명, 총인구의 0.74%)
- 경상남도 창녕군(250명, 총인구의 0.45%)
- 경상북도 구미시(2,818명, 총인구의 0.72%)
- 경상북도 칠곡군(770명, 총인구의 0.7%)
- 경상북도 고령군(117명, 총인구의 0.39%)
- 전라북도 김제시(217명, 총인구의 0.28%)
- 충청남도 공주시(592명, 총인구의 0.56%)
- 함경남도 단천군
- 함경북도 청진시
- 개성특별시 개풍군[5]
참조
[1]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16
[2]
문서
일설에는 선산김씨가 아닌 전주김씨라는 설이 있으나 당시 기록에 따르면 선산김씨가 맞다.
[3]
웹사이트
김씨(金氏) 본관(本貫) 선산(善山) 순충계(順忠系)입니다.
http://www.findroot.[...]
2022-07-26
[4]
웹사이트
본관분포
https://sgis.kostat.[...]
2023-02-24
[5]
웹사이트
김씨(金氏) 본관(本貫) 선산(善山)입니다.
http://www.findroot.[...]
2022-07-26
[6]
뉴스
정복규의 한국 성씨를 찾아서-선산김씨(善山金氏)(일선 김선궁)
http://www.shinailbo[...]
[7]
뉴스
정복규의 한국 성씨를 찾아서-선산김씨(善山金氏)(들성 김추계)
http://www.shinailbo[...]
[8]
웹사이트
선산(일선)김씨분파
http://www.surname.i[...]
[9]
문서
1939년 일제시대 선산 김씨 함경도 북종파 족보에 시조 김기가 경순왕 8자 김추라는 가상의 인물을 선계로 둔갑시켰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 김추 계열의 선산 김씨의 선계가 원성왕의 8세손 김유염과 그의 아들 김한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료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10]
문서
스스로 신라 대보공 김알지의 30세손이며, 제46대 문성왕의 후손이라 한다.
[11]
문서
외지에서는 선산 김씨로 통용되지만, 선산에서는 아직도 김선궁 계통을 일선 김씨라 하고, 경순왕의 아들이라는 '김추' 계열을 들성 김씨라 한다.
[12]
웹사이트
선산김씨 김선궁(金宣弓)계
http://www.shinjongw[...]
2006-06-28
[13]
문서
후손들 스스로 시조 김한충을 원성왕 9세손이라 한다.
[14]
문서
고려사에 김유렴이 고조부라 하는데,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에는 아버지라 한다.
[15]
서적
국역 고려명신전
성남 문화원
2004
[16]
서적
고려사
[17]
문서
원성왕 9세손 김한충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18]
문서
최정(崔精) 묘지명(墓誌銘)
[19]
문서
김기(金起)의 현손 이조참판 김광좌(金匡佐)가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세인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이후 6개 지파로 분파되었다.
[20]
웹사이트
선산 김씨 김추(金錘)계
http://www.shinjongw[...]
2006-06-28
[21]
논문
삼척김씨와 선산김씨 관조에 대한 연구 및 문헌의 고찰 -각종 문헌 고증을 중심으로-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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